
- 01 야근이 준 건 자료 취합 40분, 회의록 정리 15분처럼 눈에 보이는 개인 작업 시간이었지, 야근 총량 자체는 주당 1시간 남짓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 02 아낀 시간은 조직의 총 업무량이 그대로면 곧바로 다른 일로 흡수된다 — 도구가 시간을 벌어줘도 그 시간을 지켜줄 규칙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 03 지금은 '시간을 아끼면 정시에 퇴근한다'를 팀 규칙으로 명문화하고 매주 야근 총량을 확인하는 중이다 — 아직 예외가 남아있지만, 도구가 알아서 해결해줄 거란 기대는 접었다.
AI 도구를 업무에 들이면 야근이 줄 거라고 다들 말한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23년 넘게 조직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최근 몇 년은 사내에서 AI 도구 도입을 앞장서 밀어붙이는 역할을 하면서 직접 겪어보니 —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줄어든 시간이 있고, 전혀 줄지 않은 시간도 있다. 차이를 만든 건 도구 자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AI 쓰면 이제 야근 안 해도 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는 여러 회의 자리에서 심심찮게 나온다. 나도 처음엔 반쯤 그렇게 믿었고, 정말 그런지 석 달간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엑셀에 매일 퇴근 시각을 기록하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막상 숫자로 보니 내가 체감하던 것과는 꽤 다른 그림이 나왔다.
AI 도구를 쓰면 야근이 줄 거라 믿었던 이유
이 기대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반복되는 보고서 작성에 ChatGPT를 붙여보니, 실제로 아끼는 시간이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자료 취합에 들어가는 시간이 컸다. 여러 부서에서 흩어져 오는 자료를 한 문서로 모으는, 단순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 엑셀 파일
- 메신저 캡처
- 구두 보고
ChatGPT에 취합용 프롬프트를 만들어 붙이자 이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 정도면 한 달치로 따져도 꽤 여유가 생기겠다 싶어 혼자 김칫국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 기대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게 될 줄은 그땐 몰랐다.
같은 시기에 회의록 정리 도구도 몇 개 돌려봤다. 처음 고른 건 Otter.ai였다. 영어 회의에는 강했지만 한국어는 공식 지원 언어 목록에도 없어[1] 인식률이 낮았고, 결국 손으로 절반을 다시 고쳐야 했다 — 오히려 시간을 더 먹은 셈이다. 한국어 특화 음성인식 서비스로 소개되는[2] 네이버 클로바노트로 바꾸고 나서야 한국어 회의록 초안이 쓸 만해졌고, 회의록 준비 시간도 눈에 띄게 줄었다. 두 도구를 나란히 써보니 용도 구분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 Otter.ai — 영어 인터뷰·해외 화상회의
- 네이버 클로바노트 — 국내 대면·화상회의
도구 하나로 다 되는 게 아니라 회의 성격에 따라 갈아 끼우는 감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료 체험이 끝나고 클로바노트 유료 요금제를 개인 카드로 결제해야 했던 것도 은근히 걸렸다 — 회사 법인카드 결재 절차를 밟기엔 금액이 애매하게 작았다. 두 가지를 합치면, 계산상으로는 업무 시간에 제법 여유가 생겨야 맞았다.
실제로 줄어든 것과 줄지 않은 것
기대와 실제 결과는 크게 어긋났다. 계산상으로는 업무 시간에 상당한 여유가 생겨야 맞았지만, 석 달을 실제로 재보니 야근 총량은 도입 전후로 체감할 만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내가 시간 기록을 잘못하고 있나 싶어서 두 번, 세 번 다시 계산해봤을 정도였다.
이유를 찾아보니 간단했다. 아낀 시간이 고스란히 다른 일로 채워졌다. 회의가 하나 더 잡히거나, 옆 팀에서 자료를 급히 봐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거나. 개인 차원에서 시간을 아껴도 조직 전체의 총 업무량이 그대로면, 아낀 시간은 곧바로 다른 업무로 흡수된다는 걸 몸으로 확인한 석 달이었다. 물을 아무리 퍼내도 수도꼭지가 계속 틀어져 있으면 수위가 그대로인 것과 비슷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패턴도 눈에 띄었다. 취합 시간을 줄인 걸 알게 된 다른 팀에서 비슷한 업무를 자연스럽게 얹어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알겠다고는 했지만 퇴근은 오히려 평소보다 늦어지곤 했다. 시간을 아꼈다는 뿌듯함과 그 시간이 그대로 새 업무로 빨려 들어가는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는 날이 잦았다. 다들 한 번쯤 겪어봤을 그 “효율적인 사람일수록 일이 더 몰리는” 감각, 딱 그거였다.
진짜 문제였던 조직 관성
더 들여다보니 원인은 도구가 아니라 조직 관성이었다. 이런 암묵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으니, 개인이 아무리 도구로 시간을 아껴도 그 시간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일감을 받는 시간”이 될 뿐이었다.
- “칼퇴하면 열심히 안 하는 것 같다”는 분위기
- “일찍 끝났으면 다른 일을 더 받아야 한다”는 암묵적 룰
돌아보면 예전에 몸담았던 다른 조직에서도 똑같은 패턴을 본 적이 있다 — 도구나 업종은 달라도, “시간을 아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분위기 자체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걸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여러 번 있다. 노트북을 덮고 먼저 일어서려 하면, 다른 자리 모니터 불빛은 그대로 켜져 있는 사무실에 묘한 정적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침묵이 모든 걸 말해줬다. 그런 날은 굳이 남아있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어서라도 좀 더 앉아있게 됐다 —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데, 그땐 그게 자연스러웠다. 도구를 바꾼다고 이 관성까지 자동으로 바뀌진 않았다. 나중에 다른 팀원 몇 명한테 넌지시 물어봤더니, 비슷한 눈치를 본 적이 있다는 반응이 여럿 돌아와서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시도
최근엔 도구보다 규칙을 먼저 건드리고 있다. 시간을 아끼는 것과 그 시간을 실제로 돌려받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팀 단위로 다음 원칙을 정했다.
- 정시 퇴근 원칙 — 시간을 아끼면 그만큼 정시에 퇴근한다
- 재배정 금지 — 아낀 시간을 다른 업무에 자동으로 재배정하지 않는다
- 야근 총량 가시화 — 주간회의 안건에 “이번 주 야근 총량” 항목을 넣어 매주 확인한다
처음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규칙을 정한 초반에는 급한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다들 이번만 예외로 하자며 그대로 야근했다. 비슷한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된 뒤에야 팀장이 먼저 나서서 급한 건은 다음으로 미루고 규칙은 지키자고 선을 그었고, 그 뒤로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정착되진 않았다 — 한 달에 한두 번은 여전히 예외가 생긴다. 적어도 “도구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접었다.
결국 야근을 줄이는 건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아낀 시간을 조직이 어떻게 다루기로 하는지의 문제였다. AI로 시간을 벌었다면, 그 시간을 지키는 규칙까지 같이 만들어야 실제로 야근이 준다 — 이게 23년 넘게 일하고 나서야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도구는 계속 좋아질 것이다. 다음 질문은 “어떤 도구를 쓸까”가 아니라 “아낀 시간을 누가,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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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1 외부 Transcribe conversations in English, Spanish, French, German, Japanese, or Chinese (Simplified) – Otter.ai Help Center https://help.otter.ai/hc/en-us/articles/26660468516631-Transcribe-conversations-in-English-Spanish-French-German-Japanese-or-Chinese-Simplified
- 2 외부 비즈니스 전용 '클로바노트'를 소개합니다 – NAVER WORKS 공식 블로그 https://naver.worksmobile.com/blog/clovanote_in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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