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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

번아웃 직전에 그만둔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

이불을 덮고 잠든 사람
핵심 요약
  • 01 그만두는 이유보다, 그만두기까지 걸린 시간이 더 아까웠다.
  • 02 번아웃은 몸이 아니라 신호를 알아채는 감각부터 무뎌지는 것이었다.
  • 03 이제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숫자로 된 중단 기준부터 정해둔다.

몇 년 전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를 접었다. 평일 저녁과 주말을 통째로 밀어 넣던 습관관리 앱 프로토타입이었고, 그만둔 순간엔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낙인찍었다. 23년째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벌이고 접어온 지금 돌아보면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아쉬운 건 그만둔 이유가 아니라, 그만두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번아웃 직전까지 갔던 상황

돌이켜보면 그 무렵의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신호를 알아채는 감각 자체가 먼저 무뎌져 있었다. 계기는 본업과 완전히 별개로 혼자 만들던 습관관리 앱 프로토타입이었다. 주말 오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던 작업량이 반년 만에 평일 밤 11시부터 새벽 1~2시, 주 4일로 불어났다. 그 여파는 다음 날 업무에서 드러났다. 회의 중 방금 들은 말을 다시 물어야 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고, 중요한 자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커피는 하루 다섯 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처음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다.

수치로 잡히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잠은 하루 5시간 남짓이었는데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고, 카페인이 도는 순간엔 컨디션이 괜찮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다. 주말에 친구를 만나도 대화 도중 머릿속으로 프로토타입 버그를 떠올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한 적이 여러 번이다. 몸은 쉬는 척하고 뇌는 계속 프로젝트를 돌리는 상태 — 그게 번아웃 직전의 실제 감각이었다.

가족 모임에 참석해도 마찬가지였다. 축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머릿속 한쪽은 그날 밤 처리해야 할 버그 목록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스스로도 눈치챘다. 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은 계속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게, 그맘때 내 상태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만두기로 결정한 순간

그만두기로 결정한 순간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았다. 주말 오후, 노트북을 펼치고 프로토타입 화면을 띄운 채 한참을 커서만 깜빡이는 걸 지켜본 적이 있다. 뭘 써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왜 이걸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더는 나오지 않아서였다. “이걸 몇 달 더 붙잡고 있으면 뭐가 달라질까” —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지 못한 채 그냥 노트북을 덮었다.

그 주 안으로, 함께 만들던 지인 두 명에게 전화로 중단을 알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준비했는데 입 밖으로 나온 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 반응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전화를 끊고 회사 건물 밖 벤치에 한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실패를 인정한 느낌보다는 시험이 끝난 느낌에 가까웠다. 낯선 감정을 정리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죄책감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집에 가는 길 내내 “이래도 되나”를 곱씹었다.

주변의 반응과 실제 결과

반응은 갈렸다. 함께하던 지인 중에는 아깝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고,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 나를 더 오래 붙잡았던 건 전자 쪽 반응이었다.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을 안다고 해서[1] 그 압박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회사 동료 중에는 그런 시도 자체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 위로도 됐지만 동시에 조금 씁쓸했다.

실제 결과는 체감으로도 뚜렷했다. 그만둔 뒤로 회의 중 되묻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고, 그다음 성과 평가에서도 이전보다 나아진 평가를 받았다. 일정 관리 방식도 바뀌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던 동안엔 노션 캘린더에 모든 걸 욱여넣고도 뭔가를 놓치는 일이 잦았는데, 그만둔 뒤로는 오히려 종이 다이어리 한 권으로 돌아갔다. 관리할 항목 자체가 줄어드니, 노션의 자동 알림 기능보다 손으로 적고 지우는 물리적 감각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잘 맞았다.

다만 일정이 복잡하게 얽힌 달에는 다시 노션 쪽이 아쉬워지기도 해서, 지금은 다음과 같은 절충안을 쓴다.

  • 큰 일정 — 노션 캘린더
  • 하루 단위 일정 — 종이 다이어리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시작하기 전에 그만둘 조건부터 적는다시작하기 전에 그만둘 조건부터 적는다1두 달 무결과두 달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면 접는다2수면 30분 잠식본업 수면을 하루 30분 이상 깎아먹으면 그 시점에서 중단3기준은 착수 전에 적어둔다‘너무 힘들어지면’처럼 막연히 정하면 판단해야 할 때 판단이 안된다그만두는 것도 계획에 넣어두면 오히려 더 오래, 덜 지쳐서 일할 수 있었다.근거 · 저자가 프로젝트를 중단한 뒤 정한 착수 전 기준
계속할지 그만둘지, 그 결정을 내리던 순간

그 이후로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종료 조건부터 정해둔다 — 이런 식의 구체적인 숫자 기준이다.

  • 두 달 무결과 — 두 달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면 접는다
  • 수면 30분 잠식 — 본업 수면 시간을 하루 30분 이상 깎아먹으면 그 시점에서 중단한다

막연히 “너무 힘들어지면 그만둔다”고만 정해두면, 정작 힘들어진 순간엔 그 판단력 자체가 흐려진다는 걸 그때 배웠다.

최근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도 착수 전에 노션 페이지 한 장에 중단 기준 세 가지를 먼저 적어뒀다. 실제로 그중 하나에 걸려 두 번째 프로젝트도 예정보다 이르게 접었는데, 이번엔 후회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만두는 기준을 미리 정해두는 것 자체가 계속할 힘을 아끼는 방법이었다는 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지난 몇 년간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 중 절반 이상을 중간에 접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프로젝트는 그중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처음 정해둔 중단 기준에 여러 차례 걸릴 뻔한 고비를 넘겼다.

다만 그때마다 기준 자체를 손보면서 계속 이어온 것이지, 무작정 버틴 결과는 아니다. 그만두는 것도 계획에 포함시켜두면 오히려 더 오래, 덜 지쳐서 일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한 셈이다.

돌아보면 남는 것

이 경험 이후로 달라진 건 프로젝트를 고르는 기준만이 아니다. “끝까지 버티는 것”과 “제때 그만두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선택인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뒤집혔다. 예전엔 버티는 쪽이 힘든 선택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다르다 — 그만두는 판단을 내리고 그 결정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안다.

지금 번아웃 직전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두는 게 패배가 아니라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선택일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나 역시 그만둔 프로젝트의 코드를 아직 외장하드 어딘가에 지우지 않고 남겨뒀다. 다시 꺼내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시절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에게 계속 증명해두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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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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